E씨의 할아버지는 고령에 치매가 심해지면서 재산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친척 중 한 명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며 ‘위임장’을 받아 부동산을 팔고 예금을 인출하려 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정말로 이 위임장이 법적으로 유효할까? 할아버지를 보호할 방법은 없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고령자가 판단 능력을 상실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단순한 가족 내 갈등을 넘어, 재산권 침해와 사기 피해로 직결될 수 있습니다. 특히 치매 환자와 같이 의사결정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경우, 주변인이 ‘대리인’을 자처하면서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1. 사안의 쟁점
본 사안은 치매로 인해 의사무능력 상태에 있는 고령자(할아버지)가 작성한 위임장의 효력과, 이러한 상황에서 고령자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수단에 관한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쟁점들이 있습니다.
가. 의사무능력 상태에서 작성된 위임장의 효력
의사무능력자가 작성한 위임장에 기초한 법률행위(부동산 매매, 예금 인출 등)가 유효한지 여부
나. 성년후견제도를 통한 보호 가능성
치매 등으로 판단능력이 저하된 고령자를 보호하기 위한 성년후견제도의 활용방안
2. 의사무능력 상태에서 작성된 위임장의 효력
가. 의사능력의 의의 및 판단기준
의사능력이란 자신의 행위의 의미나 결과를 정상적인 인식력과 예기력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 내지는 지능을 말합니다(대법원 2002. 10. 11. 선고 2001다10113 판결).
특히 어떤 법률행위가 그 일상적인 의미만을 이해하여서는 알기 어려운 특별한 법률적인 의미나 효과가 부여되어 있는 경우 의사능력이 인정되기 위하여는 그 행위의 일상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법률적인 의미나 효과에 대하여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을 요합니다(대법원 2006. 9. 22. 선고 2004다51627 판결).
의사능력의 유무는 구체적인 법률행위와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판단되어야 합니다(대법원 2009. 1. 15. 선고 2008다58367 판결).
나. 치매 환자의 의사능력 판단
판례는 치매 환자의 의사능력을 판단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1) 의료적 진단 및 검사 결과
치매 진단 시기, K-MMSE(간이정신상태검사) 점수, GDS(전반적 퇴화척도) 등급, 치매의 정도(경도, 중등도, 고도) 등을 중요한 판단자료로 삼습니다. 예를 들어, 창원지방법원 밀양지원 2017. 11. 29. 선고 2016가단11327 판결은 K-MMSE 5점, GDS 6에 해당하는 말기 치매 환자의 증여계약을 의사무능력 상태에서 체결된 것으로 무효로 판단하였습니다.
2) 법률행위 당시의 구체적 상황
법률행위의 성질·내용, 법률행위 당시 가족이나 친인척 등의 동석 여부, 제3자의 사기적 행위 개입 여부, 상대방이 행위자에 대하여 법률행위의 의미 및 효과에 대한 진지한 설명을 하였는지 여부, 행위자가 그 법률행위에 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할 만한 시간과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 등을 고려합니다(부산지방법원 2018. 8. 22. 선고 2016가단354172 판결).
3) 법률행위의 동기 및 결과의 합리성
법률행위의 동기 및 결과에 합리성이 있는지 여부를 검토합니다. 예를 들어,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2017. 4. 5. 선고 2014가단25700 판결은 치매 환자가 전 재산을 증여한 사안에서, 아들이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증여가 이루어졌고 증여 전에 피고들과 원고 사이에 별다른 왕래가 없었던 점 등을 고려하여 의사무능력 상태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4) 성년후견개시 여부 및 시기
법률행위 후 성년후견개시심판 또는 금치산선고를 받았거나 의사무능력으로 볼 만한 정신감정 또는 진단서를 발급받았는지 여부, 그 경우 해당 법률행위와의 시간적 근접성을 고려합니다(부산지방법원 2018. 8. 22. 선고 2016가단354172 판결).
다. 본 사안에 대한 적용
본 사안에서 할아버지는 “고령에 치매가 심해지면서 재산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하므로, 위임장 작성 당시 의사무능력 상태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할아버지가 위임장 작성 당시 치매로 인하여 위임의 법률적 의미와 효과를 이해할 수 있는 의사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면, 그러한 위임장은 의사능력을 흠결한 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무효입니다(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 2020. 3. 4. 선고 2019가단55816 판결 참조).
따라서 무효인 위임장에 기초하여 친척이 할아버지를 대리하여 부동산을 매도하거나 예금을 인출하는 행위 역시 무권대리행위로서 할아버지에게 효력이 미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치매로 정상적인 판단 능력(의사능력)이 없었다면, 위임장을 썼더라도 위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무효입니다.
이처럼 대리권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 대신 재산을 처분한 경우는 대리권 없이 한 행위, 즉 무권대리가 됩니다.
결국 그런 매매나 예금 인출은 법적으로 할아버지에게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라. 입증책임
의사무능력을 주장하는 측(다른 가족들)이 할아버지가 위임장 작성 당시 의사무능력 상태에 있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치매 진단서, 의료기록, K-MMSE 검사 결과, 정신감정서 등의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성년후견제도를 통한 보호방안
가. 성년후견제도의 의의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되거나 부족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입니다(민법 제9조). 2011년 민법 개정으로 기존의 금치산·한정치산 제도를 폐지하고 성년후견·한정후견·특정후견의 3단계 후견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나. 성년후견개시의 요건 및 절차
1) 성년후견개시의 요건
가정법원은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사람에 대하여 성년후견개시의 심판을 합니다(민법 제9조 제1항).
여기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되었다는 것은 일시적 사무처리능력 결여의 경우나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단지 부족한 때가 아니라, 통상적으로 처리하는 사무를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헌법재판소 2019. 12. 27. 선고 2018헌바161 결정).
2) 청구권자
본인, 배우자, 4촌 이내의 친족, 미성년후견인, 미성년후견감독인, 한정후견인, 한정후견감독인, 특정후견인, 특정후견감독인, 검사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9조 제1항).
본 사안에서는 E씨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이 4촌 이내의 친족으로서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3) 심판 절차
가정법원은 성년후견개시심판을 함에 있어 감정 절차, 가사조사 절차, 당사자 심문 절차 등을 거쳐야 하며, 본인의 의사를 고려하여야 합니다(민법 제9조 제2항, 헌법재판소 2019. 12. 27. 선고 2018헌바161 결정).
다. 성년후견인의 권한 및 의무
1) 법정대리권
성년후견인은 피성년후견인의 법정대리인이 되며(민법 제938조 제1항), 가정법원은 성년후견인이 가지는 법정대리권의 범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938조 제2항).
2) 재산관리권
성년후견인은 피성년후견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그 재산에 관한 법률행위에 대하여 피성년후견인을 대리합니다(민법 제949조 제1항).
3) 신상보호권
가정법원은 성년후견인이 피성년후견인의 신상에 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938조 제3항).
4) 본인의사존중의무
성년후견인은 피성년후견인의 재산관리와 신상보호를 할 때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그의 복리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사무를 처리하여야 하며, 피성년후견인의 복리에 반하지 아니하면 피성년후견인의 의사를 존중하여야 합니다(민법 제947조).
라. 피성년후견인의 행위와 취소
피성년후견인의 법률행위는 취소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10조 제1항). 다만, 일용품의 구입 등 일상생활에 필요하고 그 대가가 과도하지 아니한 법률행위는 성년후견인이 취소할 수 없습니다(민법 제10조 제4항).
마. 본 사안에 대한 적용
본 사안에서 할아버지는 “치매가 심해지면서 재산 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민법 제9조 제1항의 성년후견개시 요건을 충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E씨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하여 성년후견인을 선임받을 수 있습니다. 성년후견인이 선임되면 할아버지의 재산을 적법하게 관리·보호할 수 있으며, 친척이 무권한으로 한 법률행위를 취소할 수 있습니다.
바. 사전처분 및 임시후견인 선임
성년후견개시심판이 확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할아버지의 재산이 부당하게 처분될 위험이 있는 경우, 가정법원에 사전처분으로 임시후견인 선임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가사소송법 제62조, 가사소송규칙 제32조 제4항).
임시후견인은 성년후견개시심판이 확정될 때까지 할아버지의 재산을 보전하고 긴급한 법률행위를 대리할 수 있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9. 6. 4. 선고 2018나2032041 판결 참조).
4. 실무적 대응방안
가. 즉시 취해야 할 조치
1) 증거 확보
할아버지의 치매 진단서, 의료기록, K-MMSE 검사 결과 등 의사무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2) 성년후견개시심판 청구
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하고, 필요한 경우 사전처분으로 임시후견인 선임을 신청합니다.
3) 재산 보전조치
친척이 이미 부동산을 매도하거나 예금을 인출한 경우, 처분금지가처분 신청 등을 통해 재산을 보전합니다.
나. 법률행위 무효 주장
1) 의사무능력을 이유로 한 무효 주장
할아버지가 위임장 작성 당시 의사무능력 상태에 있었음을 입증하여, 위임장 및 그에 기초한 법률행위(부동산 매매, 예금 인출 등)가 무효임을 주장합니다.
2) 소송 제기
친척이 이미 부동산을 매도한 경우 소유권이전등기말소청구 소송을, 예금을 인출한 경우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 형사고소 검토
친척의 행위가 사기, 횡령 등 범죄에 해당하는 경우 형사고소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5. 결론
본 사안에서 할아버지가 치매로 인해 의사무능력 상태에 있었다면, 그가 작성한 위임장은 무효이며, 그에 기초한 친척의 법률행위(부동산 매매, 예금 인출 등) 역시 무권대리행위로서 할아버지에게 효력이 미치지 않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하여 성년후견인을 선임받음으로써 할아버지의 재산을 적법하게 관리·보호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9조, 제936조, 제938조). 성년후견제도는 본인보호와 자기결정권 존중의 조화를 기본 이념으로 하므로, 할아버지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적절한 보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친척이 이미 부동산을 매도하거나 예금을 인출한 경우, 의사무능력을 이유로 한 무효 주장을 통해 소유권이전등기말소청구 또는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형사고소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