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씨는 교통사고로 다쳐서 가입한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 사정으로 차일피일 미루고 결국 보험금 청구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B씨가 이미 다른 채권자 A씨에게 빚을 지고 있었고, 재산이라고는 이 보험금 말고는 사실상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럴 때 채권자 A씨는 속수무책일까요? 아니면 B씨 대신 보험금 청구를 해서 자기 채권을 보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민법은 바로 이런 상황을 대비해 채권자대위권이라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 참고로, 여기서 A가 채권자고, B는 채무자이며, B의 채무자인 C는 A입장에서는 제3채무자라고 합니다. 이때, A의 채권을 피보전채권, B의 채권을 피대위채권이라고 합니다.
1. 채권자대위권의 개념
채권자대위권은 채권자가 자기의 채권을 보전하기 위하여 채무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민법 제404조 제1항). 이는 채무자의 책임재산의 보전을 위하여 법이 채권자에게 부여한 일종의 재산관리권으로서, 채권 자체와 별개의 실체법상의 권리입니다.
-> 쉽게 말해, 채무자가 빚 갚을 돈(재산)을 함부로 줄이거나 포기해버리면 채권자가 손해를 보게 되니까, 채권자가 대신 나서서 채무자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한 제도입니다. 즉, 채권자 본인의 권리가 아니라 채무자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는 겁니다.
채권자대위권의 법적 성질은 법정재산관리권설이 통설이며, 채권자대위권 자체에 소송법적인 효력이 부정됩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대위권을 행사하여 자기채권의 직접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고, 공동책임재산의 형성과 채권자평등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쉽게 말해, 대위권은 채권자가 법에 의해 잠시 채무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권한일 뿐, 바로 자기 돈을 받아내는 수단은 아닙니다. 대신 채무자의 재산을 보존해두고, 그 재산은 모든 채권자들이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장치라는 뜻입니다.
2. 채권자대위권의 성립요건
가. 피보전채권의 존재
채권자가 보전할 채권이 존재해야 합니다. 민법에서는 ‘채권’이라고 정하고 있으나, 채권에 한정하지 않으며 넓게 인정됩니다. 금전으로 환산이 가능한 손해배상청구권으로 전환될 수 있는 권리, 물권적 청구권, 토지 거래허가신청절차 협력의무의 이행청구권, 범위와 내용이 확정된 이혼으로 인한 재산분할청구권 등도 대위행사가 가능한 채권입니다.
쉽게 말해, 채권자가 대신 권리를 행사하려면 우선 자기 채권이 있어야 하고, 그 채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어야 합니다. 법에는 단순히 ‘채권’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조금 더 넓게 해석됩니다.
나. 보전의 필요성
채권자대위권의 행사요건인 ‘채권보전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요건으로서 채권자가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피보전채권의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게 될 위험의 존재가 인정되어야 하고, 나아가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하는 것이 그러한 위험을 제거하여 피보전채권의 현실적 이행을 유효·적절하게 확보하여 주어야 하며, 다음으로 소극적 요건으로서 채권자대위권의 행사가 채무자의 자유로운 재산관리행위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된다는 사정이 없어야 합니다(대법원 2022. 8. 25. 선고 2019다229202).
→ 쉽게 말해, 채권자가 대위권을 쓰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 적극적 요건: 그냥 두면 빚을 못 받을 위험이 있어야 하고, 대위권을 쓰면 그 위험이 줄어 실제로 채권을 받을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 소극적 요건: 반대로, 괜히 채무자의 재산관리 자유를 부당하게 방해하는 경우라면 대위권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특히 피보전채권이 금전채권인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채무자가 무자력인 때에만 채권자가 채무자를 대위하여 채무자의 제3채무자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대법원 2009. 2. 26. 선고 2008다76556 판결).
쉽게 말해, 돈을 받을 권리(금전채권)를 보호하려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돈이 없어서(무자력 상태라서) 빚을 갚을 수 없을 때만 대위권을 쓸 수 있습니다. 즉, 채무자가 돈이 충분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채권자가 먼저 나서서 대신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다. 피대위채권의 존재
채무자가 제3채무자에 대하여 가진 권리가 존재해야 합니다. 채권자 대위권은 채권자가 자기의 채권을 보전하기 위하여 채무자의 제3채무자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권리이므로 그 성립의 전제로서 채무자의 제3채무자에 대한 권리가 존재하여야 합니다(대법원 1980. 6. 10. 선고 80다891 판결).
→ 쉽게 말해, 채권자가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건 ‘채무자가 원래 갖고 있던 권리’여야 합니다. 즉, 채무자가 제3자에게 돈을 받을 권리나 어떤 청구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채권자가 대위해서 쓸 수 있는 겁니다. 채무자에게 애초에 제3자에 대한 권리가 없다면, 채권자도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게 없는 셈입니다.
라. 채무자의 권리 불행사
채무자가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야 합니다.
3. 주요 문제 사례들
가. 보험금 청구 관련 사례
사례 1: 실손의료보험 관련 채권자대위권
피보험자가 임의 비급여 진료행위에 따라 요양기관에 진료비를 지급한 다음 실손의료보험계약상의 보험자에게 청구하여 진료비와 관련한 보험금을 지급받았는데, 진료행위가 위법한 임의 비급여 진료행위로서 무효인 동시에 보험자와 피보험자가 체결한 실손의료보험계약상 진료행위가 보험금 지급사유에 해당하지 아니하여 보험자가 피보험자에 대하여 보험금 상당의 부당이득반환채권을 갖게 된 경우, 채권자인 보험자가 금전채권인 부당이득반환채권을 보전하기 위하여 채무자인 피보험자를 대위하여 제3채무자인 요양기관을 상대로 진료비 상당의 부당이득반환채권을 행사하는 형태의 채권자대위소송에서도 채무자가 자력이 있는 때에는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대법원 2022. 8. 25. 선고 2019다229202 참고).
→ 쉽게 말해, 환자가 불법적인 ‘임의 비급여 진료’를 받고 병원에 돈을 낸 뒤, 그 돈을 실손보험사에 청구해서 보험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진료는 무효이므로 보험사는 환자에게 “보험금은 잘못 준 것이니 돌려달라”는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갖게 됩니다. 이때 보험사가 자기 채권(부당이득반환청구권)을 지키려고 환자를 대신해서 병원(제3채무자)을 상대로 “진료비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돈을 갚을 능력이 충분히 있다면(자력이 있다면) 굳이 보험사가 환자를 대신해서 병원을 상대로 소송할 필요가 없으므로, 채권자대위권의 필요성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취지입니다.
사례 2: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구상권 행사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험급여를 받은 피해자의 잔존 손해액이 가해자를 피보험자로 하는 책임보험의 보험한도액을 초과하고 아직 공단의 구상청구에 응한 변제 등으로 보험금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은 경우, 피해자는 보험회사에게서 보험금을 적법하게 청구하여 수령할 권한이 있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1. 3. 11. 선고 2010나77592 판결).
→ 쉽게 말해, 교통사고 같은 경우를 떠올리면 됩니다. 피해자가 병원 치료를 받고 건강보험공단이 먼저 치료비를 부담했더라도, 피해자에게 남아 있는 손해액이 여전히 크고(즉, 보험 한도를 초과하는 손해가 있음), 공단이 가해자나 보험사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해 피해자의 권리가 이미 사라진 게 아니라면, 피해자는 직접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 부동산 관련 사례
사례 3: 명의신탁 해지 관련 채권자대위권
C의 채권자인 원고가 C을 대위하여 배우자인 피고를 상대로 명의신탁약정을 해지하고 소유권이전등기절차의 이행을 구하는 사례에서, 채권자대위권의 요건인 피보전채권의 존재, 채무자의 무자력, 피대위채권의 존재 등이 문제됩니다(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 2021. 05. 26 선고 2019가합101972 판결 참고).
→ 쉽게 말해, 채권자가 C에게 돈을 받아야 하는데, C가 재산을 배우자 명의로 돌려놓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채권자가 C를 대신해 배우자에게 “명의신탁 약정을 해지하고, 등기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겁니다. 이때 핵심 쟁점은 ① 채권자가 지킬 자기 채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② C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지(무자력), ③ C가 배우자에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피대위채권)가 실제로 있는지 등입니다.
사례 4: 무자력 판단 기준
채권자대위의 요건으로서 채무자의 무자력 여부를 판단할 때 제3자 명의로 소유권이전청구권보전의 가등기가 마쳐진 부동산의 경우, 강제집행을 통한 변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그 가등기가 가등기담보 등에 관한 법률에 정한 담보가등기로서 강제집행을 통한 매각이 가능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 부동산은 실질적으로 재산적 가치가 없어 적극재산을 산정할 때 제외하여야 합니다(대법원 2009. 2. 26. 선고 2008다76556 판결).
→ 쉽게 말해, 채권자가 대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려면 채무자가 무자력인지(돈 갚을 능력이 없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그런데 채무자 명의가 아니라 제3자 명의로 가등기가 잡혀 있는 부동산은, 강제집행을 해도 실제 돈으로 바꿔 받을 수가 없으니 재산으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가등기가 단순히 담보가등기라서 집행이 가능한 특별한 경우라면 예외적으로 재산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 계약의 청약·승낙 관련 사례
사례 5: 의사표시의 대위행사 제한
계약의 청약이나 승낙은 원칙적으로 채권자대위권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이는 특정채권의 보전이나 실현을 위하여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대법원 2012. 3. 29. 선고 2011다100527 판결).
→ 쉽게 말해, 채권자가 채무자를 대신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이미 존재하는 ‘확정된 권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계약의 청약이나 승낙은 아직 법적 효과가 발생하기 전의 의사표시일 뿐이므로, 채권자가 대신 나서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대위권으로는 채무자를 대신해 계약을 ‘시작하거나 체결’할 수는 없습니다.
4. 채권자대위권 행사의 효과
채권자가 채무자의 권리를 대위행사한 효과는 직접 채무자에게 귀속하고, 채권자 평등의 원칙에 따라 균분하게 배당됩니다. 즉, 대위채권자가 목적물을 변제받았더라도 우선변제권이 없으므로 채권자가 채권을 직접 변제받으려면 채무자로부터 임의변제를 받거나 민사집행절차를 밟아야 합니다(이상영, 『채권총론』, 박영사(2020년), 128면).
→ 쉽게 말해, 채권자가 대신 행사해서 돈이나 재산을 받아냈다고 해도, 그 효과는 곧바로 채무자의 재산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모든 채권자는 평등하게 나눠 갖는 원칙(채권자 평등의 원칙)이 적용되므로, 대위권을 행사한 채권자가 혼자 먼저 챙길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자기 채권을 돌려받으려면, 결국 채무자가 자발적으로 갚아주거나, 아니면 강제집행 절차를 밟아야만 합니다.
5. 실무상 주의사항
가. 소송요건으로서의 보전의 필요성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하는 경우 피보전채권에 대한 보전의 필요성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소가 부적법하므로 법원으로서는 이를 각하하여야 합니다(대법원 2012. 8. 30. 선고 2010다39918 판결).
→ 쉽게 말해, 채권자가 대위권 소송을 제기하려면 ‘이 소송을 하지 않으면 자기 채권을 보전할 수 없다’는 보전의 필요성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 필요성이 없는데 억지로 대위소송을 제기하면, 법원은 본안 판단을 하지 않고 바로 각하(소송 요건 불비로 재판 자체를 끝내는 것)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 무자력의 입증책임
피보전채권이 금전채권일 경우 채무자의 무자력은 채권자가 주장·증명하여야 하며, 그러한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소가 부적법하므로 법원으로서는 이를 각하하여야 합니다.
다. 채권자대위소송의 기판력
채권자가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제3채무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판결을 받은 경우에는 어떠한 사유로 인하였든 적어도 채무자가 채권자대위권에 의한 소송이 제기된 사실을 알았을 경우에는 그 판결의 효력은 채무자에게 미칩니다(이문호, 『민사법실무연구』, 박영사(2011년), 56-57면).
→ 쉽게 말해, 채권자가 채무자를 대신해서 제3채무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판결을 받으면, 그 판결의 효과는 단순히 채권자에게만 미치는 게 아니라 채무자 본인에게도 미칩니다. 단, 채무자가 이런 소송이 제기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결국 “대위소송의 결과는 채무자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6. 결론
B씨가 보험사에 대해 가지는 보험금 청구권은 확정된 재산적 권리이고, B씨가 사실상 무자력 상태라서(다른 재산이 없음) 이를 행사하지 않으면 A씨의 채권이 보전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보전의 필요성 요건이 충족됩니다. 또한 채무자인 B씨가 제3채무자인 보험사에 대해 실제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피대위채권의 존재 요건도 충족됩니다.
→ 결론: A씨는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하여 B씨를 대신해 보험사에 보험금 청구를 할 수 있고, 이렇게 확보된 보험금은 B씨의 재산으로 귀속되어 모든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배당됩니다. 다만, A씨가 직접 자기 채권을 우선적으로 만족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민사집행 절차 등을 거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