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서에 ‘민·형사상 이의제기 금지’ 문구가 있으면 소송할 수 없을까

계약서나 합의서를 작성할 때 “향후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는 경우가 많습니다. 퇴직합의서, 정산합의서, 투자금 반환합의서, 사고 합의서 등 다양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이 문구, 과연 모든 소송을 완전히 차단하는 효력이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법원은 이른바 ‘부제소합의’의 효력을 엄격한 요건 아래에서만 인정하고 있으며,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합의서에 그런 문구가 있더라도 소송이 허용될 수 있습니다.

1. ‘부제소합의’란 무엇인가요?

‘부제소합의’란 특정한 권리나 법률관계에 관하여 분쟁이 생기더라도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당사자 사이에 미리 약속하는 합의를 말합니다. 합의서에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식의 문구가 들어가면 부제소합의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 합의를 위반하여 소송을 제기하면, 법원은 해당 소를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합니다. 즉, 본안 판단조차 하지 않고 소송이 종료됩니다.

2. 부제소합의가 유효하려면 어떤 요건이 필요한가요?

대법원은 부제소합의가 유효하기 위한 요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극적 소송요건의 하나인 부제소합의는 합의 당사자가 처분할 권리 있는 범위 내의 것으로서 특정한 법률관계에 한정될 때 허용되며, 그 합의 시에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 관한 것이어야 유효하고, 그 효력의 유무나 범위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경우에는 당사자의 의사를 합리적으로 해석한 후 이를 판단하여야 한다.”

정리하면 세 가지 요건입니다.

요건내용
① 처분 가능한 권리 범위 내당사자가 스스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② 특정한 법률관계에 한정포괄적·무제한적 합의가 아니라 특정 사안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③ 합의 시 예상 가능한 상황합의 당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3. 어떤 경우에 부제소합의가 유효하다고 인정될까요?

법원이 부제소합의의 효력을 인정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퇴직합의서·희망퇴직원에 포함된 부제소합의

근로자가 희망퇴직을 신청하면서 “임금 또는 퇴직금 미지급 등 여하한 항목에 대하여도 행정상 또는 민·형사상 어떠한 형태의 제소, 고소, 진정 등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한 경우, 법원은 근로자가 미지급 임금 및 퇴직금 등에 관한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부제소합의를 하였다고 보아 이후 제기된 임금 청구 소송을 각하하였습니다.

② 사고 합의서에 포함된 부제소합의

교통사고나 폭행 사고 이후 피해자가 일정 금액을 받으면서 “이 사건 사고와 관련하여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작성한 경우, 법원은 이를 유효한 부제소합의로 보아 이후 제기된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하였습니다.

③ 공사 정산합의서에 포함된 부제소합의

공사 완료 후 공사대금 및 하자 문제에 관하여 정산합의를 하면서 “이의가 없다”는 내용을 포함한 경우, 법원은 이후 하자보수에 갈음한 손해배상 청구를 부제소합의에 위반된 것으로 보아 각하하였습니다.

④ 투자금 반환합의서에 포함된 부제소합의

투자자가 금융기관으로부터 손해배상금을 지급받으면서 “향후 위 내용으로 민원제기 및 민·형사상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작성한 경우, 법원은 이를 유효한 부제소합의로 보아 이후 제기된 투자금 반환 청구를 각하하였습니다.

4. 그렇다면 합의서를 썼어도 소송이 가능한 경우는 언제인가요?

부제소합의가 있더라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그 효력이 제한되거나 부정될 수 있습니다.

가. 합의 당시 예상할 수 없었던 손해가 발생한 경우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합의 이후 합의 당시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후발 손해가 발생한 경우, 법원은 당사자가 그 손해에 대해서까지 청구권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 합의가 손해발생의 원인인 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손해의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후발손해가 합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예상이 불가능한 것으로서 당사자가 후발손해를 예상하였더라면 사회통념상 그 합의금액으로는 화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당할 만큼 그 손해가 중대한 것일 때에는 당사자의 의사가 이러한 손해에 대해서까지 그 배상청구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다시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고 직후 경미한 부상으로 알고 합의하였는데 이후 중대한 장해가 발생한 경우가 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나. 합의 대상이 특정되지 않은 포괄적 합의인 경우

합의서의 문구가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어떤 법률관계에 관한 것인지 특정되지 않는 경우, 부제소합의로서의 효력이 부정될 수 있습니다. 대법원은 부제소합의가 특정한 법률관계에 한정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사사건 합의서에 “향후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기재되어 있더라도, 그 합의가 해당 형사사건과 관련된 사항에 한정된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에는 별개의 대여금 청구에는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본 사례도 있습니다.

다. 합의서에서 이미 지급하기로 약속한 금액에 대한 청구

부제소합의가 있더라도, 합의 당시 지급하기로 약속한 금액 자체에 대한 청구는 부제소합의의 효력이 미치지 않습니다. 부제소합의는 추가적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지, 이미 약정한 금액의 지급을 막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 합의 당사자가 처분할 수 없는 권리에 관한 경우

당사자 본인이 처분할 수 없는 타인의 권리나 법률관계에 관한 부제소합의는 그 타인에게 효력이 미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합의 당사자가 제3자의 권리까지 포기하는 내용의 합의를 하더라도, 그 제3자에게는 효력이 없습니다.

마. 민법 제104조의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해당하는 경우

합의 당시 일방 당사자가 궁박·경솔·무경험 상태에 있었고, 상대방이 이를 이용하여 현저히 불균형한 합의를 이끌어낸 경우에는 민법 제104조의 불공정한 법률행위로서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단순히 경제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합의하였다는 사정만으로는 불공정한 법률행위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5. 실무에서 주의해야 할 포인트

부제소합의와 관련하여 실무상 다음 사항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합의서를 작성하는 입장이라면:

합의서를 받는 입장이라면:

“향후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문구는 분명히 강력한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효력은 무제한적이지 않습니다. 합의 대상이 특정되어 있는지, 합의 당시 예상 가능한 상황에 관한 것인지, 당사자가 처분할 수 있는 권리 범위 내의 것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보아야 합니다.

합의서 한 장이 모든 분쟁을 영구히 차단한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반대로 합의서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소송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합의서 작성 전후로 반드시 법률 전문가의 검토를 받으시기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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