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통장만 빌려줬을 뿐인데요.”
실무에서 정말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특히 보이스피싱이나 투자사기 사건에서는 거의 공식처럼 등장합니다.
그런데 법원의 판단 기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직접 사기를 했는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역할이 범죄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었는지를 봅니다.
이 글에서는 통장을 빌려준 사람, 즉 대포통장 명의자가 언제 ‘단순 가담자’로 끝나는지, 언제 ‘사기 공범’까지 올라가는지를 풀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 “통장만 빌려줬을 뿐”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이유
보이스피싱·투자사기 사건에서 피의자·피고인이 가장 자주 내세우는 변명은 “나는 통장만 빌려줬을 뿐이고, 사기 범행에 직접 가담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사 실무에서 핵심은 행위의 외형이 아니라 ‘범죄 인식’과 ‘관여의 정도’입니다.
쉽게 말하면,“직접 했느냐”가 아니라 “이 일이 범죄라는 걸 알면서 얼마나 깊이 관여했느냐”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계좌를 제공하는 순간, 해당 명의자는 이미 다음과 같은 구조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 피해금이 유입되는 핵심 통로를 제공
- 피해금의 추적·환수를 차단하는 기능 수행
- 범행 조직의 분업 구조 내에서 불가결한 역할 담당
2. 사기방조와 공동정범 — 어디서 갈리는가
가. 사기방조 (형법 제32조 제1항)
방조범은 정범이 범행을 한다는 사정을 알면서 그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직접·간접의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범죄를 같이 한 건 아니지만, 도와준 사람”입니다.
다만, 단순히 주변에서 거들어준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범죄 실행에 도움이 됐다고 평가될 정도여야 합니다.
예시로 보면
- 친구가 사기를 치는 걸 알면서 계좌를 빌려준 경우 → 방조 가능
- 전혀 모른 채 통장을 넘긴 경우 → 방조도 안 될 수 있음
서울중앙지방법원 2015. 12. 16. 선고 2015고단6749 판결에서는, 대포통장을 명의자로부터 받아 성명불상자에게 전달하는 역할만을 한 피고인에 대하여 사기의 공동정범이 아닌 사기방조를 인정하였습니다.
나. 사기죄 공동정범 (형법 제30조)
형법 제30조의 공동정범은 2인 이상이 공동하여 죄를 범한 때에는 각자를 그 죄의 정범으로 처벌하는 것입니다.
쉽게 풀면,
“각자 역할은 달라도 하나의 팀으로 범죄를 실행했다”고 보면 됩니다.
중요한 기준은 아래와 같습니다.
- 서로 범죄를 하기로 뜻이 맞았는지
- 실제로 역할을 나눠 실행했는지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이 분담했어도 전체 행위에 대한 공범으로 처벌받습니다.
- 한 사람은 피해자를 속이고
- 한 사람은 통장을 제공하고
- 한 사람은 돈을 인출
또한 공동정범이 되면 무서운 점은, 내가 일부 행위만 했어도 전체 피해금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점입니다.
3. 법원이 공동정범과 방조를 가르는 실질적 판단 기준
가. 범죄 인식의 정도 — 미필적 고의로도 충분
사기죄 고의가 인정되려면, 범행에 대해 “확실히 알았느냐”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이거 좀 이상한데… 범죄일 수도 있겠다” 정도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이를 미필적 고의라 합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인정됩니다.
- 통장 하나에 수십~수백만 원 준다고 한 경우
- 신분증, OTP까지 같이 요구한 경우
- 정상적인 사업 이유 없이 계좌 요구
이런 상황에서 “몰랐다”는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나. 반복성·지속성
수사기관과 법원은 대포통장을 한 번 빌려준 것과 여러 번 반복한 것은 완전히 다르게 봅니다.
- 1회 제공 → 우발적 가담 가능성
- 반복 제공 → 조직 참여로 판단
다. 수익 분배 여부
실제로 수익을 어떻게 분배했는지도 중요한 판단기준입니다.
- 단순 사례금 → 방조 가능성
- 수익 비율로 분배→ 공동정범 가능성 매우 높음
예를 들어, “전체 수익금의 5% 줄게”와 같이 약속한 경우, 조직 구성원으로서 공동정범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라. 역할의 중요성 — 기능적 행위지배
수사기관과 법원의 핵심 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범죄가 돌아갔을까?”
이를 법리적으로는 “기능적 행위지배”가 있었느냐라고 합니다.
예시를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 단순 통장 명의 제공 → 방조 가능
- 돈 인출·관리까지 관여 → 공동정범 가능
4. 방조를 넘어 공동정범으로 평가되는 구체적 상황
다음과 같은 사정이 인정되면 공동정범 인정 가능성이 높습니다.
- OTP, 인증서까지 넘긴 경우
- 다른 사람 통장까지 모집한 경우
- 자금 흐름을 알고 개입한 경우
- 조직과 계속 연락하며 역할 수행
5. 추가 적용 법률 — 전자금융거래법 및 범죄수익은닉규제법
대포통장 명의자는 사기죄 외에도 추가 처벌이 가능합니다.
-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6. 민사 책임 — 형사처벌로 끝나지 않는다
형사처벌과 별개로
피해자에게 돈을 배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민사책임은 형사책임보다 범위가 더 넓습니다.
이 경우 “과실로 인한 방조”도 책임질 수 있습니다.
즉, 내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이용되는 것을 몰랐거나 확인을 안한 과실이 있는 경우 손해배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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