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표준 미연동계약서를 보냅니다.
“계약 진행을 위해 오늘 중 서명해서 회신해 주세요.”
수급사업자는 거래가 끊길까 걱정돼 어쩔수없이 서명합니다.
몇 달 뒤 원재료 가격이 급등하자 수급사업자는 원사업자에게 하도급대금 연동제를 적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 신고합니다.
이때 원사업자는 서명된 합의서를 제시하며 항변합니다.
“수급사업자가 스스로 연동하지 않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조사는 합의서가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의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작성됐는지를 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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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도급대금 미연동 합의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하도급대금 연동제는 주요 원재료의 비용이 하도급대금의 100분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 원재료 가격 변동에 따라 하도급대금도 조정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이하 ‘하도급법’, 제2조 제16항·제17항).
다만 법은 모든 계약에 예외 없이 연동제를 적용하도록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가 연동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것도 허용합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4항 제4호).
문제는 그 합의가 실제 합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원사업자는 서면에 하도급대금 연동에 따른 사항을 적을 때 수급사업자의 이익에 반하는 불공정한 내용이 되지 아니하도록 수급사업자와 성실히 협의하여야 합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3항). 미연동에 합의했다면 그 취지와 사유를 서면에 분명하게 적어야 합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4항 제4호 단서). 단순히 미연동계약서에 도장을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표준 미연동계약서에도 협의 일시와 방법, 양측 협의책임자의 성명과 직위, 미연동 대상 원재료, 각 당사자의 미연동 사유를 적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미연동 사유는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가 각각 기재합니다. 두 회사의 사유가 반드시 같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만큼 각 당사자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했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원사업자는 하도급대금 연동과 관련하여 하도급거래에 관한 거래상 지위를 남용하거나 거짓 또는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연동의무의 적용을 피하려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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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명은 합의의 증거이지만, 강요가 없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은 물론 중요합니다. 다만 거래상 우위에 있는 회사와 계속 거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명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부동산 매매나 일반적인 상거래라면 “싫으면 계약하지 않으면 된다”는 설명이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도급거래는 기존 원사업자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높고 거래처를 즉시 바꾸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공정위가 미연동 합의의 형식뿐 아니라 협의 과정까지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하도급법상 부당한 하도급대금 결정 여부를 판단할 때 수급사업자의 의사표시 자율성 제약 여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법원의 태도와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대법원 2025. 11. 20. 선고 2025다209941,209942 판결; 대법원 2024. 11. 28. 선고 2024두35125 판결).
“서명했으니 자발적 합의다”라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서명하기 전에도 수급사업자가 연동제 적용을 제안하고 조건을 협상할 현실적인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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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연동 합의 강요’로 의심받는 흔적들
가. 서명하지 않으면 발주하지 않겠다는 메시지
- “미연동에 동의하는 업체만 입찰에 참여할 수 있다.”
- “미연동계약서가 제출되지 않으면 협력업체 등록이 어렵다.”
- “이번 갱신 조건이니 서명하지 않으면 다음 물량은 보장할 수 없다.”
이런 내용이 이메일, 문자메시지나 메신저에 남아 있다면 합의서의 자발성을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표현이 노골적이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급사업자가 연동제 적용을 요구한 직후 물량이 줄거나 견적 제출 기회에서 제외됐다면, 그 전후 과정이 함께 조사될 수 있습니다. 하도급법상 부당한 하도급대금 결정 여부를 판단할 때 수급사업자의 거래의존도, 계속적 거래관계의 유무와 정도, 수급사업자가 입은 불이익의 내용과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대법원 2018. 3. 13. 선고 2016두59430 판결).
나. 계약서만 보냈을 뿐 실제 협의가 없었던 경우
원사업자가 완성된 미연동계약서를 보내면서 서명만 요구했다면 ‘성실한 협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3항).
연동 대상 원재료가 무엇인지, 어떤 가격지표를 사용할 수 있는지, 가격이 어느 정도 변동하면 대금을 조정할지에 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형식적으로 회의를 한 차례 열었더라도 계약조건을 변경할 권한이 없는 실무자가 참석해 “본사 방침이라 수정할 수 없다”고 전달했다면 실질적인 협의로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공정위 운영지침도 수급사업자의 협의신청에 응답하지 않거나 협의를 개시하겠다고 통보한 후 실질적인 협의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경우, 실질적인 단가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책임자가 협의에 임하지 않은 경우 등을 협의 거부·해태의 예시로 들고 있습니다.
다. 모든 협력업체의 미연동 사유가 똑같은 경우
수십 개 협력업체가 제출한 미연동계약서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똑같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 “상호 합의에 따라 미연동하기로 함.”
- “원재료 가격 변동 가능성이 낮아 미연동에 합의함.”
- “장기간 거래관계를 고려하여 미연동함.”
문구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위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품목과 원재료, 계약기간, 원가구조가 서로 다른데도 미연동 사유가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면 실제로 개별 협의가 있었는지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의 미연동 사유란까지 미리 작성해 보낸 경우에는 불리한 정황이 됩니다. 하도급법은 미연동 합의 시 그 취지와 사유를 서면에 분명하게 적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하도급법 제3조 제4항 제4호 단서), 이는 각 당사자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했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라. 연동을 요구한 업체만 낙찰에서 제외한 경우
가격 등 다른 조건이 비슷한데도 연동을 요구한 업체만 탈락시키고, 미연동에 동의한 업체를 선정했다면 계약 체결의 조건으로 미연동을 요구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원사업자에게 거래상대방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점과, 연동제 적용을 회피하기 위해 그 지위를 이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5항). 실제 조사에서는 입찰평가표, 업체별 견적서, 내부 결재문서, 담당자 이메일 등을 비교하면 선정 경위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마. 계약금액과 기간을 잘게 나눈 경우
하도급대금이 1억 원 이하이거나 거래기간이 90일 이내인 경우에는 원칙적인 연동 서면기재 의무의 예외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4항 제2호·제3호, 하도급법 시행령 제3조 제3항·제4항).
이를 이용해 하나의 거래를 여러 건으로 나누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1년 동안 계속되는 동일한 거래인데 2개월 단위로 계약서를 다시 쓰거나, 전체 하도급대금이 1억 원을 넘는데 발주서를 여러 건으로 나누는 식입니다. 실질적으로 동일한 원재료를 여러 항목으로 분리해 각 원재료 비중이 10% 미만인 것처럼 표시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도급법은 원사업자가 거짓 또는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연동의무의 적용을 피하려는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하도급법 제3조 제5항), 이러한 ‘쪼개기 계약’이나 원재료 분리는 그 대표적인 탈법행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바. 원재료 가격이 오른 뒤 과거 날짜로 합의서를 받은 경우
계약 당시에는 연동 또는 미연동에 관한 협의를 하지 않다가 원재료 가격이 급등하거나 조사가 시작된 뒤 합의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후에 위반 상태를 시정하는 것 자체는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약 당시의 서면 미발급이나 협의의무 위반까지 소급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법원도 서면발급의무 위반에 대한 제재는 의무 해태를 탓할 수 없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가 아닌 한 부과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2024. 11. 28. 선고 2024두35125 판결; 대법원 2024. 11. 28. 선고 2021두49208 판결).
2025년 공정위의 첫 하도급대금 연동제 제재에서도 조사 대상 업체들은 현장조사 이후 수급사업자들과 미연동 합의를 체결했습니다. 그럼에도 종전의 서면기재 의무 위반에 대해 업체별로 과태료가 부과됐습니다. 사후 시정은 과태료 감경 사유로 반영됐을 뿐, 이미 발생한 위반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4. 합의서보다 먼저 확인되는 자료가 있다
미연동 강요 사건에서는 최종 계약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계약서 발송 이메일, 수정 이력, 입찰안내문, 협력업체 공지, 회의록, 협의 참석자, 업체별 미연동 사유, 원가자료 제출 요청 내역 등이 함께 확인될 수 있습니다.
수급사업자가 처음에는 연동제 적용을 요청했다가 며칠 뒤 별다른 설명 없이 미연동에 동의한 경우라면, 그 사이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반대로 원사업자가 원재료 비중과 가격지표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고, 수급사업자에게 충분한 검토기간을 주었으며, 서로 다른 대안을 놓고 실제 협의한 기록이 있다면 미연동 합의의 자발성을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5. 미연동 ‘강요’는 단순한 계약서 미비보다 제재가 무겁다
연동에 관한 서면기재를 누락하거나 성실하게 협의하지 않은 경우에는 과태료와 벌점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하도급법 제30조의2 제5항 제1호).
그보다 무거운 것이 거래상 지위를 이용해 미연동을 강요하는 탈법행위입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5항). 이 경우 위반 횟수에 따라 단계적으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으며, 벌점도 함께 부과될 수 있습니다.
3년간 누산벌점이 5점을 초과하면 공정위가 관계 행정기관에 공공입찰 참가자격 제한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입찰 제한이 자동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차례의 미연동 강요 제재만으로도 요청 기준을 넘길 수 있는 구조입니다.
6. 표준양식을 사용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

원사업자 입장에서는 우선 해당 계약에 하도급대금 연동제가 적용되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주요 원재료와 그 비중을 객관적인 원가자료를 바탕으로 특정하고, 적용 대상이라면 연동 조건에 관해 협의해야 합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3항).
미연동을 선택한다면 수급사업자에게 검토할 시간을 주고, 계약조건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담당자가 협의에 참여해야 합니다. 각 당사자의 미연동 사유도 대신 작성하지 말고 각각 기재하도록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하도급법 제3조 제4항 제4호 단서).
계약 갱신이나 입찰 참여의 전제로 미연동계약서 제출을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과거 날짜로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실제로 하지 않은 회의를 협의 개요에 적는 것은 문제를 더 키울 수 있습니다.
수급사업자가 서명했다는 사실만으로 원사업자가 보호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도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의 동의나 승낙을 받았다는 표면적인 사정만으로 해당 행위가 부당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2025. 11. 20. 선고 2025다209941,209942 판결).
결국 미연동 합의의 효력을 지켜주는 것은 도장이 아니라, 수급사업자가 연동과 미연동 사이에서 실제로 선택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협의 과정입니다.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표준 미연동계약서를 보냅니다.
“계약 진행을 위해 오늘 중 서명해서 회신해 주세요.”
수급사업자는 거래가 끊길까 걱정돼 어쩔수없이 서명합니다.
몇 달 뒤 원재료 가격이 급등하자 수급사업자는 원사업자에게 하도급대금 연동제를 적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에 신고합니다.
이때 원사업자는 서명된 합의서를 제시하며 항변합니다.
“수급사업자가 스스로 연동하지 않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조사는 합의서가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의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작성됐는지를 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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