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가 진행되는 도중 상대방 회사의 상황이 갑자기 나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금 지급기일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다른 거래처에 대한 대금이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공사라면 분양이나 PF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고, 납품계약이라면 다음 달 지급하기로 한 물품대금을 실제로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럴 때 공급자 입장에서는 난감합니다. 계약대로 계속 납품하거나 공사를 진행하면 미수금만 커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이행을 중단했다가 오히려 계약위반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금을 지급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 경우, 상대방의 지급기일이 오기 전이라도 먼저 납품이나 공사를 중단할 수 있을까요.
일정한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민법이 인정하는 이른바 ‘불안의 항변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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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안의 항변권의 법적 근거
가. 원칙 — 동시이행의 항변권
쌍무계약에서는 원칙적으로 상대방이 자기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나도 그에 대응하는 채무의 이행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536조 제1항) .
나. 문제 — 선이행의무가 있는 경우
문제는 내가 먼저 이행하기로 약속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물품을 먼저 납품하고 60일 뒤 대금을 지급받기로 했다면, 공급자는 원칙적으로 상대방의 지급기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납품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공사 역시 기성금을 일정한 시점에 지급받기로 하면서 그 전에 공사를 먼저 진행해야 하는 구조라면 마찬가지입니다.
다. 예외 — 불안의 항변권
민법 제536조 제2항은 이에 대한 예외를 규정합니다.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게 먼저 이행하여야 할 경우에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전항 본문과 같다.”
이를 통상 ‘불안의 항변권‘이라고 합니다. 계약 당시에는 나중에 대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먼저 이행하기로 했지만, 이후 사정이 크게 달라져 상대방이 실제로 대금을 지급할지 현저히 불확실해졌다면, 무조건 자기 의무부터 계속 이행하도록 하는 것은 공평과 신의칙에 반한다는 취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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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안의 항변권의 요건 — 대법원이 제시한 법리
가. 기본 법리
대법원은 불안의 항변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판시하고 있습니다.
민법 제536조 제2항에서 말하는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유’란, 선이행채무를 지게 된 채무자가 계약 성립 후 채권자의 신용불안이나 재산상태의 악화 등의 사정변경으로 반대급부를 이행받을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하여 당초의 계약 내용에 따른 선이행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칙에 반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대법원 2026. 7. 16. 선고 2026다202468(본소), 2026다202469(반소) 판결).
나. 불안의 항변권 발생 사유는 제한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불안의 항변권을 발생시키는 사유를 신용불안이나 재산상태 악화와 같이 채권자 측에 발생한 객관적·일반적 사정만으로 제한하여 해석할 이유는 없다고 명확히 밝혔습니다.
당사자 쌍방의 사정을 종합하여 상대방의 채무가 아직 이행기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이행기에 이행될 것인지 여부가 현저히 불투명하게 된 경우에는, 선이행채무를 지고 있는 당사자라도 상대방의 이행이 확실하게 될 때까지 자기의 채무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 도급계약에서의 특칙
특히 상당한 기간에 걸쳐 공사를 수행하는 도급계약에서 일정 기간마다 기성공사금 등의 명목으로 그 대가를 나누어 지급하기로 약정되어 있는 경우, 그와 같은 공사대금의 지급은 수급인의 장래 원만한 이행을 보장하는 전제로서 기능합니다.
따라서 계약 성립 후 발생한 제반 사정으로 인하여 수급인이 공사를 계속 진행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공사대금의 상당 부분을 약정대로 지급받을 것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수급인에게 당초의 계약 내용에 따른 선이행의무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 공평에 반하게 되었다면, 비록 도급인에게 신용불안 등의 사정이 없다고 하여도 수급인은 민법 제536조 제2항에 의하여 계속공사의무의 이행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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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근 대법원 판결의 구체적 내용 — 콘도 신축공사 사건
가. 사실관계
대법원 2026. 7. 16. 선고 2026다202468(본소), 2026다202469(반소) 판결은 콘도 신축 도급계약에 관한 사건입니다.
도급계약에서는 콘도 분양수입금을 재원으로 공사대금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융위기(리먼브라더스 파산)와 국내 부동산 경기 악화로 분양이 사실상 실패하였습니다. 사전청약률은 약 9.33%에 그쳤고, 수금된 사전청약대금은 전체 공사대금의 약 0.71%에 불과하였습니다.
도급인은 청약자들로부터 사전청약금을 받고도 본계약 전환을 통보하지 않았고, 청약자들에게 사전청약금을 반환하기도 하였습니다. 수급인은 공정률 약 33.56% 상태에서 공사를 중단하였습니다 .
나. 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수급인의 공사 중단이 채무불이행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 도급계약상 공사대금은 분양수입금을 재원으로 하여 분양대금 납입 일정에 따라 순차 지급하기로 하였는데, 분양이 사실상 실패하였으므로 수급인이 공사를 완료하더라도 공사대금을 지급받을지 여부가 현저히 불투명하게 되었습니다.
- 이는 도급인이 주장하는 공사대금에 관한 담보의 실질적 가치를 고려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 따라서 수급인으로 하여금 공사를 계속 수행하게 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칙에 반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 도급인도 수급인의 공사휴지 및 공사기간 연장 요청을 받아들여 파주시에 ‘경제여건 및 분양시장의 악화’를 이유로 공사휴지 신청을 하는 등 실질적으로 수급인의 공사 중단을 수용하였습니다.
다. 실무적 의미 — 대금 지급구조 자체의 붕괴
이 판결의 실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종전에는 불안의 항변권이라고 하면 흔히 상대방 회사가 부도 직전이거나 재산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경우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판결은 반드시 상대방 회사 자체가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계약에서 예정한 대금 지급구조 자체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경우에도 불안의 항변권이 인정될 수 있음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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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안의 항변권이 인정되기 위한 정도 — ‘현저한 불확실성’이 필요하다
가. 단순한 우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거래처에 좋지 않은 소문이 있다는 정도만으로 바로 납품을 중단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불안의 항변권이 인정되려면 상대방이 장래에 자기 채무를 이행할 것인지가 현저히 불확실해진 정도여야 합니다. 즉, 상대방이 채무를 못 이행할 수 있다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당초 약정대로 선이행을 계속하도록 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칙에 반할 정도의 사정이 있어야 합니다.
반면, 불안의 항변권이 인정되지 않은 사례도 있습니다.
수급인이 공사를 최종 중단한 후 20여 일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한다는 주장을 한 경우, 법원은 수급인으로 하여금 선이행의무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칙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고 본 판결도 있습니다.
나. 실무상 고려 요소
실제 사건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게 됩니다.
| 고려 요소 | 구체적 내용 |
|---|---|
| 기존 채무 연체 | 다른 채무의 지급이 반복적으로 연체되고 있는지 |
| 강제집행 개시 | 주요 재산에 가압류·압류가 시작되었는지 |
| 도산절차 | 회생절차·워크아웃 등이 진행되고 있는지 |
| 금융조달 무산 | 약속했던 금융조달이 무산되었는지 |
| 대금 지급구조 붕괴 | 특정 사업의 매출·분양대금을 계약대금의 재원으로 예정하였는데 그 사업 자체가 사실상 실패한 경우 |
반대로 단순히 회사 실적이 조금 악화되었다거나, 담당자가 대금 지급에 관해 애매한 말을 했다는 정도라면 곧바로 이행을 중단하기에는 위험합니다.
결국 핵심 질문은 “돈을 못 받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계약대로 계속 이행하면서도 나중에 반대급부를 받을 것을 합리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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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계약서 내용의 확인 — 책임준공의무 등
가. 책임준공의무가 있는 경우
공사계약에서는 계약서 내용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대법원 사건에서도 도급인은 수급인이 분양 여부나 공사대금 지급 여부와 관계없이 공사를 끝까지 완성해야 하는 ‘책임준공의무’를 부담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사건 계약의 내용상 그러한 책임준공의무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판결을 두고 “공사대금을 못 받을 것 같으면 공사를 중단해도 된다”고 일반화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계약서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공사를 계속하도록 정하였는지, 기성금 지급조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자금조달 실패의 위험을 어느 당사자가 부담하기로 하였는지, 별도의 공사중지 사유를 정하고 있는지 등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나. 납품계약의 경우
공급계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래처의 신용상태가 일정 수준 아래로 내려가면 선결제 또는 담보제공을 요구할 수 있도록 계약서에 정해 두었다면 그 조항을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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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사등) 이행 중단 전 확보해야 할 자료
실무에서는 법리가 있다는 것보다 중단 당시 실제로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상대방이 “대금을 충분히 지급할 수 있었는데 일방적으로 납품을 끊어 사업에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행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면, 적어도 그 시점에서 상대방의 지급이 현저히 불확실하다고 판단한 객관적인 근거를 확보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정리해 둘 수 있습니다.
- 반복된 지급연체 자료
- 지급계획을 번복한 이메일·메신저 내역
- 금융조달 무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 압류·가압류 등기 자료
- 사업실적·분양실적 자료
- 자금조달을 전제로 한 계약 구조를 보여주는 계약서 조항
특히 상대방이 “조금만 더 납품해 주면 다음 달에는 전부 지급하겠다”는 식으로 계속 이행을 요구한다면 그 내용도 가급적 서면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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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행거절 의사의 통지 — 명시적 표시가 반드시 필요한가
대법원은 이행거절 권능이 인정되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상대방에게 이행거절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시해야만 이행지체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하였습니다. 대가적 채무 간에 이행거절의 권능을 가지는 경우에는 비록 이행거절 의사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아니하였다고 할지라도 이행거절 권능의 존재 자체로 이행지체책임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만 실무에서는 그와 별개로 서면 통지를 해 두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왜 이행을 중단하는지, 어떤 대금지급 위험이 발생하였는지, 어떤 조치를 취하면 다시 이행할 것인지 등을 명확하게 남겨두면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특히 일방적으로 공장 출고를 막거나 현장에서 철수한 뒤 한참 후에야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사실관계를 둘러싼 불필요한 다툼이 커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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