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체 A사는 거래처 B사의 구매담당자와 제품 단가, 수량, 납품기한을 협의했습니다. 구매담당자는 최종 견적서를 확인한 뒤 이메일로 다음과 같이 회신했습니다.
“해당 조건으로 진행해 주세요. 납기에 맞춰 생산 부탁드립니다.”
A사는 이 말을 믿고 원재료를 구입하고 생산까지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납품을 앞두고 B사가 태도를 바꿨습니다.
“담당자가 임의로 진행한 것입니다. 대표이사 승인과 내부결재가 완료되지 않았으므로 계약은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B회사는 정말 ‘내부결재가 안 났다’는 이유만으로 계약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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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론: 내부결재 미완료만으로는 계약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B사가 “내부결재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계약의 성립을 부정하는 것은 법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부결재는 B사 회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입니다. A사는 그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도 없고, 알아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법원도 이 점을 명확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설령 피고의 내부결재과정에 피고가 지적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하자가 있더라도, 피고가 사경제주체로서 체결한 이 사건 수정계약에 관하여 이미 외부적으로 표시한 의사표시의 효력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쉽게 말해, 회사 내부에서 결재가 났는지 여부는 회사 내부 사정일 뿐이고, 이미 외부로 표시된 의사표시(담당자의 이메일 회신)의 효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단계별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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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약은 어떻게 성립하나요?
계약은 한쪽이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제안(청약)하고, 상대방이 “좋습니다”라고 동의(승낙)하면 성립합니다. 복잡한 서류나 도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안에서는 어떨까요?
- A사가 단가·수량·납기 등 계약의 핵심 조건이 담긴 최종 견적서를 제시했고
- B사의 구매담당자가 이를 확인한 뒤 “해당 조건으로 진행해 주세요”라고 이메일로 회신했습니다
이 이메일 회신은 계약의 핵심 조건 전부에 대해 동의한다는 승낙의 의사표시로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즉, 이 시점에 이미 계약이 성립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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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런데 담당자에게 계약 체결 권한이 없었다면?
B사는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구매담당자는 계약을 체결할 권한이 없는 직원입니다. 대표이사만이 계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법적으로는 무권대리(권한 없는 자가 대신 행동한 것)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A사는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법리가 A사를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법 제126조).
가. 표현대리란 무엇인가요?
표현대리란, 실제로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 행동했더라도, 상대방이 그 사람에게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면, 회사(본인)가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리입니다 (민법 제126조).
예를 들어, 회사가 어떤 직원을 ‘구매담당자’로 임명하고 거래처와의 협상을 맡겼다면, 거래처 입장에서는 그 직원이 계약을 체결할 권한도 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경우 회사는 “그 직원에게는 최종 계약 권한이 없었다”고 발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 표현대리가 성립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표현대리가 인정되려면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 요건 | 내용 | 이 사안에서의 판단 |
|---|---|---|
| ① 기본대리권 | 담당자가 어느 정도의 업무 권한은 가지고 있어야 함 | 구매담당자는 협상·견적 확인 등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을 것 |
| ② 권한을 넘은 행위 | 그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 계약을 체결한 것 | 최종 계약 체결 권한이 없었다면 이에 해당 |
| ③ 상대방의 정당한 신뢰 | A사가 담당자에게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함 | 아래에서 상세히 검토 |
다. A사에게 ‘정당한 신뢰’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 사안의 핵심입니다. 법원은 “정당한 이유의 존부는 대리행위가 이루어질 때 존재하는 제반 사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A사 입장에서 정당한 신뢰를 뒷받침하는 사정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구매담당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협상을 주도한 점: 단가, 수량, 납기 등 계약의 핵심 조건을 직접 협의한 사람이 바로 그 담당자였습니다.
- 최종 견적서를 직접 확인하고 이메일로 명확하게 “진행해 주세요”라고 회신한 점: 이는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니라 확정적인 의사표시입니다.
- A사는 이를 믿고 원재료를 구입하고 생산에 착수함: 만약 계약이 불확실한 상태였다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거래 관행상 구매담당자가 이런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통상적임: 거래처 입장에서 구매담당자의 발주 지시를 믿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실제로 법원도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표현대리 책임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설령 원고 담당자의 승인 중 일부 부분에 대하여 내부적으로 대표이사 등 원고의 의사결정권자로부터 구체적인 승인을 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피고는 원고 담당자의 승인이 권한 있는 승인이라고 믿고 해당 운송에 나아간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 피고가 원고 담당자에게 권한이 있었다고 신뢰한 데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지므로, 원고는 원고 담당자의 권한을 넘은 표현대리 행위에 대하여 본인으로서 책임을 부담한다.”
라. 반대로, 표현대리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경우에 표현대리가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을 때 표현대리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 A사가 담당자에게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알 수 있었던 경우
- 계약 내용이 매우 이례적이거나 회사에 극히 불리한 내용이어서 담당자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고 믿기 어려운 경우
- 담당자가 기본적인 업무 권한조차 없는 경우
이 사안에서 B사가 표현대리 성립을 막으려면, A사가 담당자의 권한 부재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단순히 “우리 회사에 내부결재 절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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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만약 법원이 계약 성립 자체를 부정한다면?
혹시 법원이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더라도, A사에게는 또 다른 구제 수단이 있습니다. 바로 계약교섭 부당파기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입니다.
가. 어떤 경우에 인정되나요?
법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어느 일방이 교섭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하였음에도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여 손해를 입혔다면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자유 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이 사안에서 B사의 구매담당자는 “진행해 주세요”라고 명시적으로 회신했고, A사는 이를 믿고 원재료 구입과 생산에 착수했습니다. 이는 계약 성립에 대한 정당한 신뢰가 부여된 상태였다고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나. 얼마나 배상받을 수 있나요?
다만, 이 경우 배상받을 수 있는 금액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법원은 이를 ‘신뢰손해’로 한정합니다.
“계약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가 불법행위를 구성하는 경우 그러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었던 것에 의하여 입었던 손해 즉 신뢰손해에 한정된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신뢰손해란 예컨대, 그 계약의 성립을 기대하고 지출한 계약준비비용과 같이 그러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통상 지출하지 아니하였을 비용 상당의 손해라고 할 것이다.”
쉽게 말해, “계약이 성립될 것을 믿고 지출한 비용”은 배상받을 수 있지만, “계약이 이행되었더라면 얻었을 이익(기대이익)”은 배상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안에서 A사가 배상받을 수 있는 신뢰손해의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배상 가능한 손해 (신뢰손해) | 배상 불가능한 손해 |
|---|---|
| 원재료 구입 비용 | 납품이 이루어졌더라면 얻었을 이익 |
| 생산 준비 비용 | 향후 거래 기회 상실로 인한 손해 |
| 생산에 투입된 인건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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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이론적인 법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분쟁에서 이기려면 증거 확보가 핵심입니다. A사는 지금 즉시 다음 자료들을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 이메일 교신 내역 전체: 특히 “해당 조건으로 진행해 주세요”라는 회신 이메일
- 최종 견적서: 단가·수량·납기 등 계약 조건이 특정된 문서
- 원재료 구입 영수증 및 계약서: 언제, 얼마에 구입했는지 입증하는 자료
- 생산 착수 증거: 생산일지, 작업 지시서, 사진 등
- B사 구매담당자의 직책 및 업무 범위: 그가 통상적으로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 보여주는 자료 (명함, 이전 거래 내역 등)
- 이전 거래 관행: B사와 과거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진 사례가 있다면 더욱 유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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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사의 주장, 즉 “내부결재가 완료되지 않았으니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는 논리는 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구매담당자가 계약의 핵심 조건을 직접 협의하고 이메일로 명확하게 진행을 지시한 이상, ① 계약이 유효하게 성립했거나, ② 적어도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 책임이 B사에 귀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법 제126조).
설령 법원이 계약 성립을 부정하더라도, ③ 계약교섭 부당파기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원재료 구입비와 생산 비용 등 실질적인 피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A사로서는 지금 당장 관련 증거를 철저히 확보하고, 위 세 가지 청구 원인을 모두 검토하여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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